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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해외

[ 6일 / 1961년 ] '어니 데이비스' 흑인으로 처음 하이스먼 트로피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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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 장래가 촉망받았는데 미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난 선수들이 있다. 그중의 대표적인 선수가 미식축구의 어니 데이비스(Ernie Davis)다. 미국계 흑인 미식축구 선수로서 미국 프로 미식축구 NFL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꼽힐 정도로 우수한 선수인데 일찍 세상을 떠났다.

1939년 12월 14일 펜실베니아 뉴 살렘에서 출생한 데이비스는 부친이 그가 태어난 후 사망하고 외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등 어려서부터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12살 때 뉴욕에서 어머니와 양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했는데 운동 신경이 뛰어나 학교의 농구, 야구, 미식축구 등 여러 종목 팀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다. 

데이비스는 특히 미식축구에서 재능을 인정받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여러 대학에서 입학 제안을 받았는데, 미국 프로 미식축구 NFL의 거장 짐 브라운이 그에게 자신의 모교인 시라큐스 대학이 흑인 학생선수를 환영하는 곳이라고 설득하여 1958년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시절 데이비스 / news.syr.edu

당시 규정에 따라서 데이비스는 1학년 때에는 실제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훈련에서는 러닝백으로서 그의 속도와 힘을 마음껏 뽐내며 연습을 지배했다. 1960년 3학년 때 877 러싱 야드라는 우수한 기록을 세우고, 코튼 볼(Cotton Bowl)에서 시라큐스 대학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를 수상한다. 1961년 4학년 때에는 14개의 터치다운과 823 러싱 야드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운다. 

1961년 12월 6일 데이비스는 하이스먼 트로피(Heisman Trophy)를 수상한다. 미국계흑인선수로는 처음으로 수상한 것이다. 하이스먼 트로피는 미식축구 선수이자 감독인 하이스먼의 이름을 딴 상으로 1935년부터 매년 대학 미식축구에서 가장 활약한 선수에게 준다.

1962년 NFL 신인 드래프트에서 데이비스는 전체 1순위로 워싱턴 레드스킨스에 지명된다. 이어서 클리블랜드 브라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구단주가 데이비스를 시라큐스 대학 입학을 권유했던 짐 브라운과 함께 뛰게 하려고 그를 적극적으로 영입한 것이었다. 

그런데 1962년 7월 마지막 대학 올스타 게임 직전에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백혈병을 치료하고 다시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치료를 시도했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 1963년 5월 18일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눈을 감는다. 23살의 나이에. NFL에서 한 번도 뛰지 못하고 말이다.

데이비스는 1963년 3월 ‘Saturday Evening Post’에 "돌이켜보면 제 자신이 운이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 동안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라는 글을 썼다.

뉴욕 엘미라에 있는 더 네이버후드 하우스에서 열린 장례식에 1만 명 이상의 추모객이 조의를 표했고, 미국 의회 상하원도 그를 추모했다. 아래 유튜브 영상은 시라큐스 대학 스포츠부의 추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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