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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해외

[5일 / 1972년 ] 올림픽 최악의 참사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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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8월 26일 서독 뮌헨의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개막식을 치르면서 일정을 시작한 뮌헨 하계올림픽은 1936년 나치 정권이 개최한 베를린 하계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독일에서 열린 올림픽이다. 서독 정부는 뮌헨 올림픽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평화의 이미지를 세계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약 600여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은 역대 최대 규모의 임원 및 선수단을 이끌고 뮌헨 올림픽에 참가하였다.

뮌헨 올림픽 11일 차가 되는 9월 5일 어둠이 깔린 새벽 4시 30분경 신원을 알 수 없는 8명의 남자가 올림픽 선수촌 외부 담장을 넘어 선수촌 내부로 들어갔다. 그들은 곧장 이스라엘 선수단이 있는 숙소 건물로 향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숙소 건물로 들어서면서 가방에 숨겨온 총기를 꺼내 들고 이스라엘 레슬링 코치와 역도 선수 등 두 명을 사살했다. 새벽 총소리에 놀란 이스라엘 선수들과 코치들은 혼비백산 달아났지만 결국 9명은 테러리스트에 의해 인질로 잡혔다.

자신들을 검은 9월단(Black September)이라고 밝혔는데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극단주의 세력으로서 이스라엘에 수감된 아랍인 234명과 서독에 구금된 독일인 테러리스트 2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오전 9시를 시한으로 정하고 이를 넘기면 매시간 한 명의 인질을 처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 건물의 검은 9월단 / historycollection.com

대테러 부대가 없었던 서독은 뮌헨 경찰청장 등이 테러리스트들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협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서독 경찰이 급습하여 이스라엘 인질을 구출하려고 시도했으나 그 모습이 TV로 중계되는 바람에 실패하기도 했다.

협상이 실패하고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이지 않자 테러리스트들은 카이로로 가겠다며 서독 정부에 헬리콥터 2대를 요구해 인질들과 함께 헬리콥터로 약15마일 떨어진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공군 기지에서 경험이 부족한 서독 경찰 저격수들이 납치범들에게 사격을 가했고, 이에 테러리스트들은 응사하고 헬기에 묶여 있던 9명의 인질에게 총격을 가하고 수류탄을 터뜨렸다. 결국 테러리스트 5명과 인질 9명은 모두 사망했고, 테러리스트 3명은 생포되었다.

비극이 발생하고 나서 올림픽을 계속 진행할 것인가 논의가 있었지만 IOC와 서독 정부는 올림픽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 6일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3,000여 명의 선수와 8만여 명의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열렸고, 올림픽은 추모식를 치를 때까지 34시간 동안 중단되었다. 이스라엘 선수단은 철수하여 뮌헨을 떠나 이스라엘로 돌아갔고, 수영 종목에서 7개의 금메달을 딴 미국의 수영 선수 마크 스피츠도 유대계라는 이유로 뮌헨을 떠나야만 했다. 이집트, 필리핀, 알제리 선수단도 안전을 이유로 뮌헨을 떠났다.

생포된 3명의 테러리스트는 그로부터 한 달 후, 루프트한자 615편 납치 사건에서 팔레스타인 납치범들의 요구에 따른 인질 교환을 통해 풀려났다. 이들은 리비아로 갔는데 그곳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한편 이스라엘 정부와 모사드는 뮌헨 학살의 주범을 사살하기 위한 비밀 작전 '신의 분노'를 비밀리에 펼쳤다. 이후 몇 달 동안 여러 명의 용의자가 암살되었지만 1973년 노르웨이에서 무고한 남성이 오인 사살되면서 임무는 중단되었다. ‘신의 분노’의 표적이었던 검은 9월단의 책임자 알리 하산 살라메는 1979년 작전의 마지막 임무에서 차량 폭탄에 의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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